2015년 8월 19일 수요일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파란만장한 한사람의 삶과  한 나라의 모습이다. 무척 재미있고 통쾌한 부분도 있다.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일단 신자유주의를 거부하고 우리나라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민중의 힘으로 우리 운명을 열어나갈 자신감을 가져야 할텐데... 정치하는 이들이 민중을 생각하지 않으니 너무 먼 얘기가 되는 것 같다. 

다음은 책 일부를 옮긴 것이다.
 
새 헌법이 포함하고 있는 또 다른 여성의 권리는 사회가 가정주부들의 가사노동에 대해 보장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헌법에 이렇게 쓰여 있다. "국가는 노동권 적용에서 남성과 여성에게 평등하고 공정한 대우를 보장해야 한다. 국가는 가사노동을 사회복지와 건강을 생산해내며 부가가치가 있는 경제활동으로 인식한다.  - 121쪽


베네수엘라는 소수의 권력과 부를 독점한 사람들의 땅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적으로 미인, 석유, 과소비 등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은 지배계층 소수에 국한된 것일 뿐이며, 대다수의 민중들은 착취와 수탈 속에 신음하고기만당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세상에 대해 제대로 깨닫고 하나의공통된 변혁 과정(볼리바리안 혁명)에 단결해서 참여하고 있다. 

민중이 사회의 주인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차베스는 이러한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002년 말부터 2003년 초반에 걸쳐 한창 우리가 '석유 테러'라고 불렀던 석유파업이 있었을 때. 베네수엘라의 기득권층과 그들의 국제 동맹세력(미 제국주의)이 석유 정제소들을 파괴하고, 수백만 리터의 우유를 버리고, 가축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사회 붕괴, 혼란 등을 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방면으로 엄청난 노력을 했지만 석유도 없고 천연가스도 없고 음식물도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피델이 우리에게 콩을 가득 실은 배를 보내주면서 전화로 '나중에 여건이 되면 갚아라'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다른 물품들은 브라질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콜롬비아로부터 우유, 고기, 석유들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몇 리터의 연료를 사기 위해 사흘 나흘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 힘든 어느 날 오후에 나는 몇몇 동지들에게 저 산골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산골마을로 갔습니다. 거리는 분주했습니다. 사람들은 쌀, 바나나 등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근처를 다닐 때 사람들이 우리에게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상황이 어떠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강한 인상의 흑인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끌어당기면서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우리가 집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장작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쌀, 감자, 파초 등을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나의 눈을 지그시 보더니 양복저고리를 잡고 말했습니다.

'차베스, 내 집에는 의자가 남아 있이 않아요. 당신이 보고 있는 저 장작이 침대 다리에요. 우리는 가구, 지붕을 뜯어서 불을 피울겁니다. 우리는 문도 떼어낼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서 요리를 할 거예요. 하지만 절대 물러나지 마세요, 차베스.'

우리가 이 나라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300만 명의 사람들이 노인과 같은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베네수엘라 민중들은 이전에 볼리바르가 꾸었던 꿈, 모두 단결해서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라틴아메리카를 하나로 통합해서 제국주의에 맞서고 완저한 해방을 쟁취하는 꿈 말이다. 이 과정은 매우 어렵겠지만 종국에는 성공할 것이다. 쿠바 민중, 베네수엘라 민중, 볼리비아 민중, 브라질 민중이 우리는 하나라는 자각을 가지고 제국주의에 맞서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 170,171 쪽

 이 책이 나오고 이미 10년 가까이 흘렀다. 차베스는 더 많은 일을 하지 못하고 죽었고 중남미 국가들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세상이, 세대가 바뀌고 있는 10여년이다.

2015년 8월 11일 화요일

영화 암살

영화 중간중간 눈물 짓고, 끝나고 나서는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뒤바뀐 역사, 반역의 세월... 절로 나오는 긴 한 숨....

감독이 뛰어난 사상가여서가 아니라 "예술은 그 자체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진보적 삶에 기여하는 '진보적 속성'을 갖고 있다"는 오래된 명제가 떠오른다. 낮술도 잘 안들어갈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 서빙하는 젊은이들이 예전에는 대견스러웠는데, 이젠 안타깝고 안돼보인다. 
 
버스타러 나오니 8차선 도로, 사람 안보이는 무지 넓은 인도.  "야~악!" 소리를 질렀다. 답답함이 좀 가신다. 관객 천만은 쉽게 돌파할 것 같은데, 왜 세상은 변하지 않는지...
 
 

민중언론학의 논리 - 손석춘

<민중언론학의 논리> 손석춘. 2015. 2월. 철수와영희 출판사

빌려서 읽고 있는데 살지 말지 망설이는 중이다. <민중>이라는 단어에 대한 그의 설명이 맘에 든다.

머리말
민중.
지금 누군가 그 말을 쓰면, 더구나 언론학자가 학술 서적에서 쓴다면, 지적 나태로 보이기 십상이다.  "아직도 1980년대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라는 힐난이 쏟아질 성싶다. 실제로 나는 이미 어느 학회에서 그 말을 들었다. 그것도 '진보'를 내세운 학회에서 일어난'사건'이다.

최근에 참석한 어느 학계 토론회에선 대학가에 큰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며 종합일간신문에 고정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어느 교수가 "민중이란 말은 저항적 담론이라 적절하지 않다"고 사뭇 진지하게 발언했다.

그랬다. '민중'은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학계 안팎에서 폐기되거나 '죽은 개'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묻고 싶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모든 것, 당신이 들고 있는 이 책, 스마트폰, 입고 있는 옷, 앉아 있는 의자, 건물, 오가는 길, 그 모든 것을 만들어온 노동자, 특히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 우리 사회 모두에게 밥을 제공해왔으면서도 스스로는 수출 중심 경제구조에서 내내 '찬밥'을 먹어온 농민, 이른바 '구조조정'의 일상화로 인해 과포화 상태에 이른 자영업인,  청년 실업자들,  남편의 얇은 임금으로 가계를 꾸려가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 그 '사람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시민'이나 '국민'으로 그들을 담아낼 수 있는가?

적잖은 지식인들이 '민중'의 호명을 1980년대의 '운동권적 사유'로 치부하지만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민중'은 그보다 훨씬 이전, 일제 강점기는 물론 조선왕조 시대에도 쓰인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민중이라는 말에 '운동권'이라는 낡은 색깔을 주입시켰을까. 다름 아닌 언론기관이다. 바로 그래서다. 민중언론학을 이 책이 제안하는 까닭은.

... 중략 ...
 
더는 에두르지 않고 명토박아둔다. 해방 70년, 분단 70년을 맞으며 '민중언론학'을 제기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언론인이 될 수 있는 우리 시대 -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정보과학기술 혁명의 영향을 받고 있다 - 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다. 지금 이 순간도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모바일메신저 등으로 다양하게 '언론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 곧 네티즌에게 바로 당신이 '21세기 민중'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언론활동이 더 풍부해지려면 학문적 '무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정보혁명 시대의 민중인 네티즌이 자신과 이웃을 '민중'으로 옳게 호명할 때 비로소 개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진실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누군가가 '네티즌이 곧 민중'이라는 논리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아니 그 이전에 '민중'이라는 말부터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럴수록 이 책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길 소망한다. 미국에서 '시민미디어센터'(Center for Citizen Media)를 설립한 댄 길모어(Dan Gilmor)는 네티즌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미디어(We the Media)"라고 주장했다. 그는 '시민'이란 말을 즐겨 썼지만, 민중언론학은 우리가 미디어인 시대에 "우리가 민중(We the People)"임을 선언한다. '위 더 피플'은 공교롭게도 미구 오바마 정부가 개설한 '백악관 청원사이트'이름이어서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그만큼 보편적인 논리가 될 수 있다.

다만 미국의 지성인들도 경고하고 있듯이 인터넷, 모바일 시대에 그 민중은 가장 멍청하거나 천박한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는 네티즌을 멍청하게 만드는 누군가가 조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는 비단 밖에만 있지 않고 우리 안에도 있다. 누가 네티즌을 멍청하게 만드는지 꼭 짚어야 할 이유다.

무릇 모든 학문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민중언론학은 우리가 민중이라는 사실 확인과 더불어서 누가 네티즌을 멍청하게 만드는가라는 절박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2015년  2월      손석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