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9일 금요일

민중언론학의 논리 (9장) - 손석춘

9장. 남북통일사상의 '하부구조'와  소통에서

통일담론과 통일운동에 헤게모니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방송 KBS 의 '국민 통일의식 조사'에 따르면, 2014년 8월 현재 이른바 '통일 대박론'을 지지하는 여론이 과반을 넘고...  - 274쪽.
돈에 미쳐있는 우리나라 모습에서 이제 '통일도 돈'이라고 보는 시각을 퍼뜨리는 것 같다. 그 '돈'이 우리에게 전혀 오지 못할 거라는 걸 생각은 할까?


통일담론에서 헤게모니를 잃어가는 듯한 통일운동진영
남쪽 시민사회에서 줄기차게 전개되어 온 통일운동이 통일담론에서부터 헤게모니를 잃어가며 침체 국면을 맞고 있기에 문제는 더 심각하다. 흡수 통일론을 저지하기는커녕 자칫 견제할 주체마저 튼실하게 꾸리지 못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살 남쪽 학계에서는 이미 1990년대 이후 '역사적 재난과 자연적 재난이 겹친 북의 체제 위기상황'을 지켜보면서 "대부분의 통일 연구가 암묵적으로 남한 주도하의 평화통일을 전제" 해왔다.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평화 통일'되었듯이 남북 사이에도 체제 경쟁이 사실상 끝났다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흡수 통일론이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자연스럽게 동의를 얻어가고 있는 현실을 더는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 할 과제가 우리 시대 철학에 주어져 있다. 철학이 통일의 시대사적 과제를 어떻게 사유하고 실천했는가를 짚어보아댜 할 이유가 여기 있다.  - 275쪽.


조중동이 '반통일세력'에서 '흡수통일론'으로 바뀌는 모습
흡수 통일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여론시장을 독과점해온 언론사들은 큰 몫을 했다. 조중동은  남북관계와 관련된 모든 사안에서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을 강조하고 그 밖의 통일론에는 '주사파' 떠는 '종북'의 딱지를 붙이는 프레임frame 으로 일관해 왔다.
세 신문 가운데 가장 극단적 보도로 일관한 조선일보는 6.15공동선언이 나올 때부터 '대한민국 정체성을 위협한다'는 논리로 비판해왔다.  조선일보는 남북 정상회담을 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친북좌파 정권'을 몰아세우는 보도와 논평을 서슴지 않았고, 동아일보도 이에 가세했다. 세 신문 가운데 남북 정상회담에 상대적으로 긍정적 모습을 보였던 중앙일보도 흡수 통일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삼성이라는 대자본의 시장 확대 전략 차원에서 남부관계의 진전을 바라고 있었기에 비교적 온건해 보였을 뿐이다. 

독과점 언론들의 흡수 통일론은 흔히 '냉전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렇게만 인식하는 것은 객관적 조건은 물론 주체적 조건의 변화를 경시한 오류다. 남과 북이 분단된 이후 내내 통일운동을 주도해온 사회단체와 비판적 지식인들은 남쪽에 분단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해나가는 '분단세력'이 존재한다고 전제해왔다. 오랫동안 통일운동의 헤게모니를 지녔던 그들에게 조중동은 분단세력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그'이자 '나팔수'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통일운동 세력이 비판해왔던 '분단세력'은 지난 20년에 걸쳐 서서히 진화해왔으며 더는 통일에 소극적이지 않다. 분단체제의 유지, 강화가 아니라, 적극적인흡수 통일론으로 스스로를 '재무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의 언술을 보기로 들 수 있다. 

"통일로 가는 길엔 수많은 장애물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에 대한 무관심과 통일 비용에 대한 과도한 걱정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단으로 인한 손실이 통일에 드는 비용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왔다."

뜻밖에도 이 언술은 시민사회로부터 내내 '반통일 세력'으로 꼽혀온 조선일보가 광복절 기념으로 낸 사설의 결론 대목이다.(조선일보 2014.8.14)

6.15공동선언에 대해 '대한민국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해온 조선일보는 2014년 신년특집으로 '통일이 미래다'를 의제로 설정하며 흡수 통일을 능동적으로 전개해나가고 있다. 분단세력의 '공세적 변화'는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북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남과 북의 경제력 차이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벌어지고, 김정은으로 3대째 후계가 이어지는 객관적 조건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 276, 277쪽
분단비용이 통일비용보다 훨씬 크다는 것은 통일운동진영에서 줄곧 하던 말이다. 그말을 이제 조선일보가 하고 있다. 실제로  통일에 대한 '돈'도 장악해가고 있다.
 조선일보가 기업들 통일 관련 기금 빨아들이고 있다


 헌법 일치 불가능,흡수통일 해야 한다는 주장
이 글은 통일을 '남에 의한 북의 흡수'로 현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전제하는 한국의 정치,경제,언론계 엘리트들이 공유하는 사유방식과 논리에 담긴 사상적, 실천적 함의를 분석하고, 그들과의 소통을 위해 남북통일의 사상, 통일의 철학을 우리가 어떻게 형성해가야 옳은가를 탐색한 결과물이다. -278쪽

'헌법철학'과 흡수통일의 한계   
'자유민주적 입헌주의' 사상과 '주체사회주의' 사상 사이에 접점이 없다는 주장은 비단 철학의 직무유기를 질타한 철학자만의 '독창적' 결론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한국 정치, 경제,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독고점 언론사의 고위 언론인들과 그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는 교수들도 유사한 주장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해왔다. - 280쪽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주체사상이라는 헌법철학적 접근은 흡수 통일론이 근거한 '배타적 이분법'에 지나지 않는다. 배타적 이분법에 근거한 흡수 통일론은 뿌리가 깊다. 그들은 이북에 대한 적대적 담론이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병수가 비판했듯이 자유민주주의의 의미를 민주화의 맥락이 아니라 오직 반공의 맥락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을 대한민국의 역사와 대한민국의 헌법적 이념으로부터 배제"하는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 이병수는 "남한 사회에서 그간 이루어져 온 민주화와 남북의 평화공존의 진전을 누락한  채 이야기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란 결국 반공을 구시로 삼았던 과거 독재정권에 대한 향수와 미화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병수와 통일인문학은 흡수 통일론을 비판하며 '차이'를 인정하는 '갈등의 평화적 관리'를 논리적으로 제시했다(이병수, 2010) >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실제로 헌법철학이 구현되는 생생한 현실이다. 남쪽의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철학이 과연 그대로 현실에 구현되고 있는가에 긍정적으로만 대답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 281쪽
무엇을 '반대'하는 것으로 정체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만들어 가는'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게 정상이지 않나? 가는 길에서 걸림돌을 치우는게 맞지 돌을 치우기 위해 길을 만드는게 아니지 않나.


헌법철학적 접근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학적 사유가 개념들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겨 절대화한다면, 관념론에 매몰될 수 있다. 현실을 고정불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언제나 변화한다고 보는 철학적 사유는 남과 북의 '헌법 현실'을 보는데도 타당하다. 실제로 이미 남쪽과 북쪽 모두 수차례에 걸쳐 헌법을 개정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구나 남과 북의 헌법이 명문화한 조항과 구체적 현실에 차이가 큰 이유가 다름 아닌 '분단체제'에서 빚어졌다는 데 주목한다면,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주체사상을 들어 두 헌법철학이 양립할 수 없다며 '분단체제론'이나 '남북공동선언'을 비판하는 것은 섣부르다. 풍부한 현실을 새롭게 포착함으로써 분단체제로 왜곡된 '자유민주적 입헌주의' 사상과 '주체사회주의'사상을 넘어서는 사상을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구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구상은 서로의 차이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동일성의 통일을 넘어 "타자성을 인정하면서 공존이라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새롭게 배우는 과정"에서 가능하다.

주목할 것은 어떤 시대든 새로운 사상이 큰흐름을 형성할 때, 단지 철학적 사유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남과 북의 통일을 이끌어 갈 사상도 그 문맥에서 짚어야 옳다.  - 283쪽



통일에 대한 '하부구조'를 설명하는 재미있는 이야기
통일사상의 사회경제적 기반
어떤 사상이 특정 시대를 주도해갈 때는 언제나 그럴만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하부구조'로 자리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새로운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결정되면 이에 따라 법률이나 정치 제도, 학문과 같은 상부구조의 형태도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남과 북을 통일하는 사상 또한 지금까지 역사가 발전해온 흐름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남과 북의통일에 사상적 기반은 중요하고, 통일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공유 또는 공감해야 할 사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사상이 철학자들의 책상에서 관념적 조합이나 결합만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제시한 명제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 착각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를 적대시하는 문화가 지배적인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그 말은 철학은 빈곤하다는 뜻이 아니다. 빈곤한 철학을 할 게 아니라 풍부한 현실을 포착하는 철학을 하자는 제안이다.

기실 '자유민주적 입헌주의' 사상과 '주체사회주의' 사상 사이에 접점을 찾는 게 어렵다는 '언술'정도는 굳이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다 알고 있다. 따라서 철학자의 '직무'는 둘 사이에 접점을 찾기 어렵다는 상식적 주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있지 않다. 통일을 이룰 사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모색해야 한다.  사상과 사회경제적 변화는 대체로 조응해왔기 때문이다.

남과 북 체제에 접점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은 결국 흡수 통일론의 정당성과 당위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또한 하부구조를 갖고 있다. 남쪽에 의한 북쪽의 흡수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의 하부구조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전제한다.

문제는 철학이 의식했든 아니든 대한민국 헌법의 경제 조항과 달리 실제 경제는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수출 대기업 중심의 신자유주의식 체제'라는 데 있다. 결국 그 체제로 북을 흡수하는 주장이 되거나 적어도 그것을 옹호하는 데 '헌법철학적 탐색'이 기여한다면, 과연 그 '철학적 문제 설정'은 우리 시대 '철학의 직무유기'를 벗어난 사유일까, 아니면 의도와 달리 역사발전에 더 걸림돌이 될 '철학의 직무유기' 일까.   -  283,284,285쪽



 

댓글 없음:

댓글 쓰기